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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트로 힘겹게 술을 멀리하고 있었는데 아무 생각 없이 책을 펼쳤다가 결국 맥주를 마셨다.
p17
나에게는 어떤 대상을 말도 안 되게 좋아하면 그 마음이 감당이 잘 안 돼서 살짝 딴청을 피우는, 그리 좋다고는 하지 못할 습관이 있다. 말도 안 되게 좋아하다 보면 지나치게 진지해지고 끈적해지는 마음이 겸연쩍어 애써 별것 아닌 척 한다. 정성을 다해 그리던 그림을 누가 관심 가지고 살펴보면 괜히 아무 색깔 크레파스나 들어 그림 위에 회오리 모양의 낙서를 마구 해서 별것 아닌 것처럼 만들던 여섯 살 적 마음이 아직도 남아 있다. 말도 안 되게 좋아하는 걸 말이 되게 해보려고 이런저런 갖다 붙일 이유들을 뒤적이기도 한다. 그래서 술을 좋아하는 것 같다. 술은 나를 좀 더 단순하고 정직하게 만든다. 딴청 피우지 않게, 별것 아닌 척하지 않게, 말이 안 되는 것은 말이 안되는 채로 받아들이고 들이밀 수 있게.
+) '별것 아닌 것처럼 만들던 마음'의 묘사를 읽고 몸을 긁게 된다. 나는 술을 덜 좋아하는 건지, 술을 마신다고해서 단순해지고 정직해지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지만 술이 아니더라도 감당이 안 되는 마음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p128
취향의 확장과 함께 넓어지는 세계. 멋진 말이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그게 와인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돈으로 결코 환산할 수 없는 충만한 기쁨과 소중한 기억들을 안겨줄 테고, 그건 분명 멋진 세계일 것이다. 하지만 그 멋짐을 마음 편히 누릴 수 있는 사람에 나는 해당하지 않는 것 같았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대개의 취향은 돈을 먹고 자란다. 그 때문에 어떤 취향의 세계가 막 넓어지려는 순간 그 초입에 잠시 멈춰서서 넓어질 평수를 계산하고 예산을 미리 짜보지 않고서는 성큼 걸어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 주변 친구들이 모두 직장에 다니기 시작한즈음부터 취향의 확장을 실감했던 것 같다. 그에 비하면 나는 아직 메뉴판 내에서의 취향 확장도 버거운 상태다. 메뉴판의 최상단에 위치한 대표 메뉴는 맛의 대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애써 부정했던 지난 날과 달리 과감하게 4번째에 위치한, 최상단 메뉴보다 2천원 가량 비싼 메뉴도 가끔 시키는 정도다. 돈을 쓰는 상황에서도 돈은 아껴야 하는 존재이지 쓰여야 하는 존재가 아니었던 탓에 취향의 확장은 커녕 취향의 잔향만 간신히 맡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겠다. 취향 탐색에 도통 열리지 않는 지갑때문에 아직까지 빛을 보지 못한 내 취향들이 건강하게 잘 지내다 언젠간 나와주길 바랄 뿐이다.
p161
분명 10년 가까이 알았는데 서로에 관해 잘 안다고 '추측'했지만 지나고 보면 잘 몰랐다. 지나고 보면 상대도 나도 적정선 안에서 '나이스'했다. 지나고 보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결국 기질 차이인 것 같다. 술이 얹어진 말들을 싫어하는 기질과 술이라도 얹어져 세상 밖으로 나온 말들을 좋아하는 기질. 나는 항상 술을 마시고 꺼내놓았던 말들보다 술 없이 미처 꺼내지 못한 말들을 훨씬 후회스러워하는 쪽이었다. 누군가 술기운을 빌려 나에게 꺼내놓는 말들을 소중히 담아놓는 쪽이었다. 때로는 그 말이 우리를 나쁜 방향으로 이끌고 갈 때도 있지만, 어쨌든 '나이스'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게 고여 있는 것보다는 어느 쪽으로라도 흘러가는 편이 낫다고 믿는다.
+) (뻔뻔히) 내가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게 작은 자랑 중에 하나였는데 연락이 만남으로 이어지지 못한 관계들은 그저 '나이스'한 수준에 머무르게 되는 것 같다. 무리하지 않는, 선을 넘지 않는, 수위를 조절하는 사람말고 무리하게 되는, 적정선을 넘게 되는, 수위 조절이 힘든 사람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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