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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학이 필요한 시간
    밑줄 2021. 2. 13.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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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459716

     

    철학이 필요한 시간

    현실감 있고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풀어주는 '새로운' 인문학에 빠져보자『철학이 필요한 시간』의 저자 강신주는 일반 교양독자들의 목마름을 가장 잘 이해하는 철학자이다. 그는 대학 강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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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려운 책을 대신 읽고 설명해주는 형태이다 보니 꼭꼭 씹으면 소화가 잘 된다. 사전적인 의미만 알고 있던 단어들, 아니 사실 대충 의미만 짐작하는 수준이지 한자 의미도 잘 몰랐던 단어들을 풀어서 설명해줘서 친절하게 느껴졌다. 매 챕터마다 추가적으로 참고할만한 책까지 안내하고 있는데 솔직히 찾아 읽을 자신은 없어서 자연스럽게 패스했다. 뭐 하나 배울 때 천천히 자세히 친절하게 배우면 더 많이 배우고 싶은 마음도 들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p34

    에픽테토스는 페르소나와 맨얼굴을 동시에 가지고 삶을 영위해야만 하는 인간의 숙명을 간파했던 철학자였다. 다시 말해 페르소나에 집착하다가 맨얼굴을 망각하거나, 혹은 맨 얼굴에 신경 쓰다가 페르소나를 경시하는 것, 이 두 가지 극단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성찰로 인해, 우리는 삶에서 겪는 모든 고통과 갈등이 어디로부터 유래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맨얼굴을 드러내야 할 때 페르소나를 쓰거나, 반대로 페르소나를 드러내야 할 때 맨얼굴을 보여주려 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자! 맨얼굴이 없다면, 페르소나를 쓰는 일도 없다는 사실을. 페르소나에 지나치게 신경 쓰는 우리에게 맨얼굴의 관리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맨얼굴이 건강하다면, 우리는 다양한 페르소나를 쓸 수 있는 힘을 얻을 것이다. 불행히도 맨얼굴을 관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이 쓰고 있는 페르소나를 벗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페르소나를 벗는 순간 망가진 맨얼굴을 볼까 두렵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 에픽테토스가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가르침이 아니었을까?

     

    +) 가끔은 어떤 게 페르소나이고 어떤 게 맨얼굴인지 구분이 잘 안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스스로 보이는 내 모습이 너무 어색하게 느껴져서 집에 빨리 가고 싶어지곤 한다. 이젠 뭐든 적당한 게 좋은 거라는 걸 알면서도 나조차 부담스러운 페르소나 때문에 지치기도 하고, 페르소나를 갑자기 뚫고 나오는 맨얼굴에 당황하기도 한다. 페르소나와 맨얼굴에 차이가 없을 순 없겠지만 두 모습의 각각의 매력은 충분히 살릴 수 있어야 내 모습에 지치거나 당황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p39

    나는 어려서부터 성인의 가르침을 읽었으나 성인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지 못했으며, 공자를 존경했으나 왜 공자를 존경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알지 못했다. 그야말로 난쟁이가 광대놀음을 구경하다가 사람들이 잘한다고 소리치면 따라서 잘한다고 소리를 지르는 격이었다. 나이 오십 이전의 나는 정말로 한 마리 개에 불과했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나도 따라서 짖어댔던 것이다. 만약 남들이 짖는 까닭을 물으면 그저 벙어리처럼 쑥스럽게 웃기나 할 따름이었다.
    - 속분서 / 성교소인

     

    +) 나이 오십 넘어서도 이렇게 냉정한 자기객관화가 된다는 게 멋지다.

     

    p43

    이미 일어난 생각은 이어지지 않도록 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생각은 일어나지 않도록 하면 그대들이 10년 동안 행각하는 것보다 좋을 것이다. 나의 생각에는 불법에는 복잡한 것이 없다. 단지 평상시에 옷 입고 밥 먹으며 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 임제어록

     

    +) 사서 걱정을 연이어 하고 있는 요즘 무척 든든해지는 말이다. 내가 하는 걱정이 실행으로 이어지면 모르겠는데 꼭 그렇지도 않으니 지금은 무사한 하루를 보내는데만 집중하고 싶다.

     

    p48

    물론 임제의 사자후가 부처, 조사, 나한, 부모, 친청을 실제로 죽이라는 뜻은 아니다. 단지 미래나 과거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현재의 삶을 가릴 때에만, 자신의 관념 속에 있는 부처, 조사, 나한, 부모, 친척을 죽이라는 것이다. '지금 그리고 여기서' 자유롭게 된다면, 임제의 표현을 빌리자면, "해탈"한다면, 우리는 부처, 조사, 나한, 부모, 친척을 만날 때 그 현재적 만남을 향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라는 철저한 부정 끝에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긍정이 찾아올 수 있는 법이다. 결국 참된 자유 혹은 참된 해탈은 우리가 타자를 기억이나 기대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으로 응대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자, 이제 임제의 가르침을 이해했다면, 오늘부터라도 만나는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죽이도록 하자. 현재를 잡을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 경험치가 가져다주는 예측이 가져다주는 편안함을 아주 무시할 순 없겠지만 그 어줍잖은 예측이 현재의 대상과의 만남을 가로막는다면 걷어내야 한다. 그 대상이 나이든 타인이든 현재에 집중해야 한다.

     

    p107

    기독교 신자라면 맹자가 이야기하고 있는 '하늘'에서 '신'을, 그리고 '하늘의 명령'에서 신의 명령을 연상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너무나도 성급한 판단이다. 맹자에게 있어 하늘과 천명은 모두 인간의 노력 뒤에서나 드러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을 다하고 난 뒤에야 맹자는 우리가 자신의 본성과 하늘을 알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맹자의 태도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먼저 믿고 숭배하는 기독교인들의 태도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만약 자신의 마음을 다하고 자신을 닦지 않는다면, 누구든 하늘과 하늘의 명령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마음을 다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어떤 일을 할 때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쏟아붓는 것을 의미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자를 통해 자신의 본성을 알게 되고, 후자를 통해 자신의 한계를 알게 된다.

     

    p109

    동양의 사유 전통에서 이상적인 인격, 즉 군자이든 진인이든 모두 생사에 초탈했던 이유는 다른 데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극한에 이를 때까지 최선을 다해 수행했던 사람들이었다. 그 한계 상황에서 불행히도 죽음이 자신을 반기게 되더라도 그들은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아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죽음을 앞두고도 당당할 수 있었다. 그들은 삶에 더 이상 미련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다 해본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삶에 미련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비극적 당당함이 요약된 구절이 바로 '진인사대천명'이란 짧은 구절이다.

     

    +)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쏟아붓는 경험을 해보지 못한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모른다. 굳이 모든 힘까지 가지 않더라도 80%를 쏟아붓는 경험도 해본지 너무 오래된 것 같아 슬프다. 퇴사 전에도 미련이 계속 남았던 게 내가 정말 최선을 다했는지 의문이 들어서였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댔지만 마지막까지 쏟아붓는 경험을 못해보고 나온 것 같아서 아쉬움이 계속 남는다.

    p116

    에피쿠로스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어리석은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살아 있을 때 죽음은 우리와 무관한 것이다. 우리는 사라 있기 때문이다. 반면 죽었을 때 우리는 죽음의 고통을 느낄 수도 없다. 그리스 현자의 이런 생각은 냉정해 보이지만 확실히 옳은 것이다. 그가 이토록 죽음에 대한 어리석은 공포를 해체하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많은 사람들은 때로는 죽음을 가장 큰 악이라고 생각해서 두려워하고, 다른 때에는 죽음이 인생의 악들을 중지시켜준다고 생각해서 죽음을 열망한다. 반면 현자는 삶을 도피하려고 하지도 않으며, 삶의 중단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삶이 그에게 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삶의 부재가 악으로 생각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음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현재는 단순히 긴 삶의 아니라, 가장 즐거운 삶을 원한다. 그래서 그는 가장 긴 시간이 아니라 가장 즐거운 시간을 향유하려고 노력한다. 
    -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 죽음 이후의 고통이 쓸데없이 상상되어서 장기기증 이라는 문구를 볼때마다 흠칫한다. 느끼지도 못할 고통에 쫄아있다는 게 우습다.

     

    p150

    주희에게서 인의예지는 씨앗이고, 측은지심 등 사단은 새싹이다. 다시 말해 인의예지는 원인이고 측은지심 등은 결과라는 것이다. 정약용은 이러한 생각을 뒤집는다. 측은지심 등 사단이 원인이고 인의예지가 결과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측은지심과 관련된 맹자 이야기를 다시 떠올릴 필요가 있다. 맹자에 따르면 "갑자기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상황"에 직면하면 누구나 측은지심과 같은 동정심이 생긴다. 옳은 지적이다. 그렇지만 맹자의 논의에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동정심을 갖게 된 사람은 과연 위기에 빠진 어린아이를 구했는가? 아니면 실패했는가? 만약 측은지심을 품은 누군가가 위기에 빠진 어린아이를 구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그를 인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것이 정약용이 품고 있던 생각이었다.

    정약용의 생각을 따르다보면, 우리는 맹자나 주희가 위기에 빠진 어린아이에 대해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저 측은지심은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유래한 마음이라는 생각만이 맹자나 주희의 이야기에서 확인될 수 있을 뿐이다. 맹자나 주희의 윤리적 감수성이 인간의 본성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정약용의 그것은 바로 위기에 빠진 어린아이에 가 있었던 셈이다. 다시 말해 우리 마음에 '측은지심'이 생겼을 때 주희는 그것을 발생시킨 '본성'이라는 내적 원인으로 자신의 사유를 진행시켰던 반면, 정약용은 그 어린아이를 구해야 한다는 '실천'이라는 외적 방향으로 자신의 사유를 진행시킨 것이다. 결국 정약용에게 인의예지라는 유학의 가치 덕목은 마음의 본성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주체적 노력과 실천을 통해서 달성될 수 있는 덕목들이다. 그래서 그는 인의예지란 가치 덕목은 우리에게 내재하는 본성이 아니라 '우리의 실천'을 통해서만 확립되는 무엇이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 이런 내용이 교과서에 나오면 더 이해가 쉽지 않을까 싶다.

     

    p158

    베버가 지적했던 것처럼 현대 사회는 분업화와 전문화의 과정을 통해 구조화된 사회이다. 분업화와 전문화가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우리는 서로에 대해 무관심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조직에 속해 있어도 서로가 무슨 일을 하는지조차 알지 못하며, 심지어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모든 일들이 너무나 전문화되고 분업화되어 있어서 우리는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도대체 어떤 성격의 일인지 반성할 틈도 별로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렌트가 지적했던 것처럼 언제든지 아이히만이 될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아이히만처럼 무사유의 상태에 빠져 있다면, 아이히만이 저지른 악, 즉 무사유로 인한 악은 도처에서 생겨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아렌트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지금 당신은 근면과 성실이란 미명 아래 사유의 의무를 방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금 당신이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하고 있는가?"

     

    +) 이제 친구들이 각자의 일을 시작한지가 좀 되어서 어떤 일을 하고 사는지 궁금해진다. 내가 전혀 모르는 일의 형태가 워낙 많다보니 듣다보면 이런 게 일이 되는구나 싶은 것들도 보인다. 회사에서 하는 일 중에 내가 아는 부분은 극히 일부일텐데 '사유의 의무'까지 바라는 게 좀 너무하다 싶다가도 일을 하면서도 '내가 무슨 일을 하는건가' 싶을 때가 있는 걸보면 내가 반성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도 복이 아닐까 싶다.

     

    p204

    소통이란 단어를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흔히 소통이란 의사소통을 상징하는 커뮤니케이션의 번역어 정도로 이해되고 있다. 그렇지만 '트다'라는 뜻의 소와 '연결하다'는 뜻의 통이란 글자로 구성되어 있는 소통이란 개념은 더 심오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소통은 구체적으로 막혔던 것을 터서 물과 같은 것이 잘 흐르도록 하는 작용을 나타내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이라는 개념보다 '소'라는 개념이 더 중요하다고 하겠다. 막혔던 것을 터버리지 않는다면, 물과 같은 것이 흐를 수 없다. '소'라는 개념은 우리 마음으로부터 선입견을 비운다는 것, 그러니까 장자가 말했던 '비움'이나 '잊음'과 같은 맥락에서 사용된다. 마음으로부터 선입견을 비워야만 타자와 연결될 수 있는 희망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 비워야 채운다. '트다' 라는 뜻의 '소' 일줄은 상상도 못했다.

     

    p213

    잊지말자. 불교에서 모든 요동치는 마음을 극복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내부로부터 요동치는 마음은 극복의 대상이었지만, 외부로 인해 요동치는 마음은 긍정의 대상이었다. 전자가 타자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도록 만드는 마음이라면, 후자는 타자를 있는 그대로 조우하여 그에 섬세하게 반응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산들바람이 불면 고요한 물은 그에 걸맞게 부드럽게 요동친다. 간혹 폭풍이 몰아치면 고요한 물은 그에 상응하여 거칠게 요동친다. 불교에서는 바로 이런 상태의 마음에 도달하고자 했다. 불교가 내부로부터 요동치는 마음을 부정하려고 했던 진정한 이유는 타자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반대로 생각해보자. 타자의 고통이나 행복에 조금도 공감하지 않는 것, 다시 말해 어느 경우든 고요한 물과 같은 마음 상태를 유지하는 것, 이것은 자비를 꿈꾸던 불교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상태일 것이다.

     

    +) 침착하고 쿨한데 타인에 대한 따뜻한 마음. 키야.

     

    p219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역린이 있기 마련이다.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반성하고 체계화하는 일은 우리가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덕목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단지 타자를 설득하는 데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을 아니다. 논리적으로 정당화된 생각만으로 상대방을 실제로 움직이기 어려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무의식적 정서, 즉 상대방이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 상대방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을 읽을 수 있는 타자에 대한 감수성이다. 오직 그럴 때에만 상대방을 설득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표면적으로 상대방은 나의 이야기를 의식적으로 옳다고 인정할 수는 있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타당한 주장, 즉 논리적으로 옳은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상대방을 실제로 움직이도록 할 수 없는 이유는, 나의 이야기가 그의 역린을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비판적이고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은 상대방의 역린을 읽을 수 있는 수사학적 감수성이 없다면 빛을 발할 수는 없는 법이다.

     

    p223

    논리적 사유란 독특한 주장을 할 수 있고 동시에 그것을 정당화 할 수 있는 이유를 대는 사유라고 할 수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논리적 사유의 핵심이 이유나 근거를 찾을 수밖에 없는 독특한 주장을 할 수 있느냐의 여부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사람은 모두 죽고 소크라테스는 사람이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죽는다"고 말할 때, 그가 논리적이거나 이성적이라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그가 멍청하다고 느끼면서 웃음을 터뜨릴지도 모른다. 그의 주장은 너무나 분명하여 아이들이라도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어떤 사람이 기계적으로 형식적인 추론을 할 수 있다고 해서, 그를 놀리적인 사람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사태를 새롭게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이다. 진정으로 논리적인 사람이 되려면, 시인처럼 예리한 감수성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 

     

    +) 보통 엄빠랑 싸울 때 이런 스탠스를 취하는데 사실 내가 말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그른 주장일 때는 많지 않다. 상대방의 역린을 읽지 못한 것처럼(?) 대응해서 상대를 짜증나게 한다는 게 문제지. 감수성이 있어도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하는 나를 반성한다.

     

    p236

    아우라를 가진 풍경은 다시는 반복될 수 없을 것이라는 느낌을 우리에게 준다. 다시 이곳에 온다고 해도 이런 느낌을 가지리라는 보장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풍경을 만나면 사람들은 서둘러 디지털 카메라에 풍경을 담기에 바쁘다. 그러나 아쉬움을 뒤로 하고 그곳을 떠나는 차 속에서 사진을 확인하는 순간, 무엇인가 빠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진 속의 풍경에는 실제 풍경이 가지고 있던 아우라, 다시 말해 숨을 쉬며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이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다.
    (중략)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술작품이나 풍경 앞에서 전율할 때가 있다. 그것의 아우라를 느낀 것이다. 그 순간 우리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고맙게 느끼게 될 것이다. 살아있기 때문에 이런 매혹적인 것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것에서 아우라를 느끼는 순간은 동시에 우리 자신이 행복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모나리자가 아니어도 좋다. 주변의 작은 것에서도 아우라를 느낄 수 있다면 말이다. 무더운 여름 하늘 위를 떠가는 구름에서도,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줄기에서도, 아니면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에서도, 아우라를 충분히 느낄 수 있을니까.

     

    +) 그래서 짧게라도 동영상을 찍어둘까 하는데 사실 더 생생한 건 일기다. 

     

    p265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시간은 두 종류로 분할된다. 하나는 자본에 고용되어 생산 활동에 종사하는 노동 시간이다. 다른 하나는 직장을 떠나서 보내는, 기 드보르가 '비활동'이라고 부르는 여가 시간이다. 여가 시간은 노동을 하지 않는 시간이어서 자유로운 시간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대중매체는 우리의 자유를 가만두지 않는다. 대중매체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노동해서 만든 상품에 대한 소비 욕망을 증폭시키고 있다. 결국 여가 시간의 활동마저도 자본주의는 자유롭게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다. "활동의 외부에는 어떤 자유도 있을 수 없으며, 스펙터클의 맥락에서는 모든 활동이 부정된다"는 말의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여가 시간을 노동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시간이라고 착각했다. 그렇지만 여가 시간은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시간이 결코 아니다. 대중매체가 제공하는 볼거리들에 사로잡히거나 아니면 상품을 구매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여가 시간을 낭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여가 시간은 자유로운 창조의 시간이나 여유로운 휴식의 시간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상품들로부터 유혹당하도록 고안된 시간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 드보르는 여가 시간 동안 우리가 노동의 결과에 대해 "굴복"하고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 영화도 드라마도 몰입해서 보다가도 약갼 일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책에서 진정한 여가라고 하는 '자유로운 창조의 시간', '여유로운 휴식의 시간'이 진짜 뭔지 몰라서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일단 눕고 생각을 안하면 그게 쉬는 것처럼 느껴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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