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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6852153
DW한테 선물로 받은 책. 두께를 보고 금방 읽을 줄 알았는데 읽는 도중에 문장을 몇 번 다시 읽게 된다. 분류는 에세이라고 하는데 약간 '시' 같기도 하고. 앞에 숫자를 달아 짧은 글들이 구분은 되는데 전체적인 통일성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p16
존재에 측정 가능한 질량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체중이 때에 따라 늘어나기도 줄어들기도 하는 것처럼 내가 느끼는 나 자신의 존재감 또한 변화할까. 존재의 질량이 늘어나는 만큼 이 세계에서 더 많은 부분을 내가 차지하고 있다고 느끼게 되는 걸까. 어떻게 하면 원하는 만큼 늘어날 수 있을까, 혹은 줄어들지 않도록 잘 유지할 수 있을까. 그 변화를 예민하게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나을까, 혹은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이 나을까.
+) 어느 날엔 내가 우주의 티끌처럼 느껴지기도 하다가도 또 어느 날엔 빵빵한 풍선마냥 내가 크게 부풀어 보이기도 한다. 그런 상황을 만드는 건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주로 외부적인 요인일 때 내 존재의 질량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되는 것 같다. 무엇이든 그렇듯 존재의 질량의 변화도 적당한 수준으로 느끼는 게 좋겠지만, 모든 게 그렇듯 '적정량'은 영원히 알 수가 없다.
p36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나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보이고자 하는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 더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을 때,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거울을 보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프리즘이 보여주는 환영에 스스로 취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 앞에 무수히 많은 내가 서 있다. 프리즘 속에서 빛을 잃고, 필연적으로 굴절되어 길을 잃는다. 나의 뒷모습들이 일시에 나를 돌아보지만,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다.
+)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사회적인 자아를 가짜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까지 배제한 좀 더 날것의 자신을 보는 경험을 보통 술 덕분에 하지 않을까 싶다.
p49
현재에 있는 마음을 즉각 기록해 두면 나중에 읽었을 때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읽을 때마다 단어들 사이에서 어떤 시간이 움트고 새롭게 일렁인다. 때로는 애틋하게, 때로는 차분하게 되살아난다. 늘어져 있던 나를 다시 일어서게 만들기도 하고, 두 번 울게 만들기도 한다.
기록은 스러져 가는 마음을 되살리는 일이다. 순간의 물결을 고이 간직하는 일이다. 그러니 어떤 마음이든, 마음을 기록하는 일만큼은 게을리하지 말 것.
+) 읽으면서 일기를 쓰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했다. 일기는 열심히 쓰는 만큼 열심히 읽어야 그 의미가 완성되는 것 같다. 그나저나 몇 달 전에 읽은 책 리뷰를 이제야 적고 있는 지금처럼 현재의 마음을 기록하는데 텀이 생기면 결국 빈틈이 생긴다.
p54
'어떻게 살 것인가?와 '나는 어떤 인간인가?'는 정확히 같은 질문인 것처럼 읽힌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곧 나 자신을 증명하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행위와 그 방식만이 존재를 발현한다. 그러므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생각을 제외하면 하루의 끝에 돌이켜 본 '오늘 하루 동안의 나'는 거의 나라는 인간 자체와 같다.
지난 날을 제외한 오늘 하루 동안의 나는 어떤 인간인가?
삶을 바꾸는 것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답은 살아가면서 언제든지 바뀔 수 있지만, 질문은 바뀌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절대적인 좌표에 영원히 남겨진다.
+) 그동안 궁금한 게 없어서, 질문이 없어서 불안했던 것 같다. 되는 대로 사는 게 사는 대로 될 수 있어야 했는데 순서가 뒤바뀌었다. 더 자주 틀려도 좋으니까 더 많이 궁금해하고 더 열심히 답을 찾았으면 좋겠다.
p85
내가 옳다고 믿었던 사실들이 언젠가 나를 배신할지도 모른다. 어떤 사실도 절대적으로 옳을 수 없기 때문이다. 꽤 합리적이라고 믿었던 나 자신의 생각도 얼마간 시간이 지나 몇 걸음 떨어져서 보면 달라 보인다. 금세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나 자신의 논리성을 지나치게 믿어서는 안 된다. 순간적인 확신에 속아서는 안 된다. 말을 하는 도중에 말은 스스로 견고해지고 방어적으로 다른 말들을 튕겨내는 습성을 지닌다. 그것이 아집이다. 오직 나만이 논리적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내가 무언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판단할 수 있다는 생각 또한.
늘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다. 애써 고집을 피울 필요도 방어할 필요도 없다. 굳이 아는 척할 필요도 반론할 필요도 없다. 아주 조금이라도 무언가 잘못됐다고, 그릇된 확신이라고 느껴진다면 애초에 스스로 말하기를 멈출 줄 알아야 한다. 말없이 긍정할 줄 아는 자세는 언제나 어설픈 논리에 앞선다.
+) 역시 언제나 입을 닫아야...
p103
관계의 무게 추는 단 한 순간도 수평을 이루지 못한다. 혹은 일시적으로, 이미 지나가버린 찰나에 잠시 이루어지고 사라졌거나, 어느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지를 잘 아는 사람이 언제나 관계를 주도한다. 실은 어느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관계란 본질적으로 기울어지기 마련이라서 우리가 의도적으로 수평을 맞추고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균형을 느끼고 있다면 착각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거리감이다. 가깝거나 멀거나 서로 연결되어 있음, 그 자체에 온 마음을 다해 집중하는 일이다.
+) 중요한 건 거리감이라는 게 어떻게 읽어야할지 모르겠다. 마지막 문장은 균형 잡힌 관계를 바라지 말고 관계에 집중하라는 것 같은데...
p115
말은 그저 말로서 존재한다. 열의를 다해 설명하고 설득하고, 무언가를 증명해 보이려고 하지만 몇 마디 말은 끝내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말을 통해 서로 듣고 이해하고 다시 말에 대해 몇 마디 말을 더할 수 있을 뿐이다. 증명은 언어가 아니라 행위가 한다. 초래되는 현상이, 드러나는 결과가 하는 것이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 언급하거나 어떤 일이 다 벌어진 뒤에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행동한 뒤에 돌이켜봄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천연스레 증명될 뿐이다. 내가 말을 꺼내지만 꺼내진 말은 내 것이 아니다. 한 번도 내 것이 아니었고 허공에 떠다니는 침묵과 다르지 않았다. 행위보다 앞선 말은 오히려 행위를 퇴색시킨다. 행위야말로 증명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증명하는 가장 단순하고 확실한 방법이다.
+) 행위까지 못 다다를 내 의지가 염려되어 행위보단 앞선 말을 자주 뱉어왔던 것 같다. 실제로 그 말이 행위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달성하기 전까진 텅빈 공약일뿐이라 스스로 실망감을 키우기도 했다. 대부분의 말은 입밖이 아닌 마음 속에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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